인연이 머무는 곳에
어쩌면 삶은 인연의 연속일지 모릅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아니면 새로운 세상이든, 만나고 헤어지고, 머물고 없어지는 모든 것들이 어쩌면 인연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지만 인연은 아주 자연스럽게 다가와야지, 인위적이고 강제적으로 누군가에게 종속된 인연이어서는 곤란합니다.
운(運)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에게 찾아오는 것처럼, 인연도 그 인연을 맞아들일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아주 작고 사소한 인연일지라도 소중히 여겨는 마음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사람은 매일매일 새로운 인연과 더불어 살아갑니다.
우연히 또는 필연으로, 길을 가거나 일을 통해서 악연과 선연을 교차하면서 말입니다.
또 나처럼 불러그란 가상의 공간을 통해, 모습이나 품성, 또는 얼굴이나 모습조차 알지 못하면서 맺어진 인연도 있습니다.
사람은 이처럼 서로 모든 것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단 한 가지만 닮으면 얼마든지 친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 친한 부분을 키워나가는 것이 바로 인연인 것입니다.
예로부터 장사 중에 가장 이윤이 남는 장사는 사람이라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만큼 큰 부가가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인연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얻으면, 그 사람이 가진 능력 역시 도움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연의 결과를 함부로 단정하거나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도 사람을 많이 아는 것만큼 큰 재산은 없습니다.
이처럼 인연은 만들기는 어려워도 허물기는 한순간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좋은 인연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내 마음이 흔들리거나, 내 행동이 그릇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인연이라도 그 인연을 가치 있고 소중하게 만들어가는 것은 결국 자신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인연이 머무는 곳에 살아가야 진정 행복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인연이 사라지는 순간 어쩌면 그 사람의 가치 역시 사라지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에게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거나, 소용 가치가 없는 존재로 비춰지면, 자신이 원하지 않아도 외톨이로 전락되기 쉽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려고 애쓰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인연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 말입니다.
사람은 본시 자신보다 조금 부족하게 보이는 사람에게는 친절하지만, 자신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사람에게는 시기하고 경계하게 됩니다.
곁으로는 아닌 것처럼 포장해도, 윗사람에게는 한없이 약하면서도, 아랫사람에게는 한없이 강한 것이 사람의 본성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인연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고 싶다면, 앞에 나서기보다는 뒤에서 묵묵히 도움을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그렇게 정(情)으로 인연의 깊이를 만들어야지, 재물을 통해서는 그 인연이 결코 오래가지 못합니다.
이처럼 인연이란 결국 정(情)이란 마음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흔희들 사람이 너무 무르면 손해를 본다고들 합니다.
냉정할 때는 냉정하고 단호할 때는 단호해야 하며, 끊고 맺음이 분명해야 한다고들 합니다.
그러면서 너무 차서도 안 되고, 너무 정이 넘쳐서도 안 된다고 말 합니다.
하지만 소중한 사람에게는 그래서는 안 됩니다.
소중한 사람일수록 가슴에 품어야지 이해득실을 따지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크기를 돈으로 환산할 수 없듯이, 소중한 사람은 내가 원해서 얻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연이 갈라지면 사람도 떠나고 재물도 떠납니다.
그리고 덩달아 행복도 떠나버립니다.
그 뒤에 남겨진 것은 초라한 나의 그림자요, 말라버린 황패한 마음뿐입니다.
떠나간 뒤에, 버린 뒤에, 후회하거나 아쉬워하지 말고, 나와 함께 할 때 거짓됨이 없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인연이 머무는 곳에서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길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정은 마음에 품어야 소유할 수 있다
정은 내 것인 것 같지만 온전히 내 것만은 아닙니다.
분명 내 마음속에 있는 것임에도 물처럼 흐르고 흘러 다른 사람의 마음속 기쁨이나 슬픔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즐거움이 되고 또 때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커다란 짐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대로 주려하지만, 받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새로운 변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정은 결코 싸워서 이길 수 없는 것이니까요.
정이란 길거리에 버려둔 채 버려 둔 지키지 않는 물건과 같습니다.
어느 누구든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주인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정이란 걸 겁니다.
이처럼 정이란 내가 아닌 상대방을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에게 정을 쏟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마음이 쏠리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정은 일방적인 듯 하지만 전염병처럼 옮겨가 서로 마음의 소통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한 정이란 어쩌면 우리가 매일 먹는 밥과 같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생쌀로 먹어도 먹을 수는 있겠지만, 밥은 뜸이 들어야 제 맛이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단단한 껍질로 덮인 벼를 알곡으로 만들고, 쌀뜨물을 걸러내서 솥에 담아 열을 가하고 뜸을 들이는 과정을 통해 밥이 되어지는 것처럼,
정이란, 언어(말)의 맹목적인 의사전달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정성이 첨가되어 만들어지는 요리와도 같으니까요.
이처럼 정이란 정적(靜的)이기보다는 동적(動的)이기에 정이 많은 집안일수록 큰소리가 많이 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정을 흘러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까운 가족일수록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이어야 합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가족간의 언쟁이나 토닥거림과 같은 큰소리가 나는 것 역시 정의 또 다른 표현방법인 것이죠.
물론 이성에 의해 걸러진 절제라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서로 정을 표현하는 것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깊은 정이라도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면 알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정을 나누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정이란 놈이 너무 한 곳에 편중되면 그건 집착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집착은 결국 떳떳함을 사라지게 하고 자신의 욕망만을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미 가진 것임에도 더 가지려고 하고, 가진 것을 베풀기 보다는 울타리 안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자가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정은 인간관계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와 같습니다.
누구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그리워하거나 증오하는 것 역시 정이 만들어 낸 내 마음속 허구일 런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감정을 앞세운 인간관계는 어쩌면 부적절할 런지도 모릅니다.
사랑과 같은 따뜻한 정을 앞세운 인간관계는 몰라도, 병적인 집착이나 미움을 앞세운 인간관계는 결국 좋지 못한 결과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미움이란 감정은 사람을 작아지게 보이게 하고 사랑이란 감정은 사람을 더 크게 보이게 하니까 말입니다.
이처럼 정은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씹듯이 꼭꼭 씹어 삼켜봐야 진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지고지순한 정을 베풀고 있음에도, 그 정을 단지 잔소리나 관심을 얻으려는 행동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쯤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새로운 마음이 들어오듯이 정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고인 물이 썩기 쉽고, 가둬둔 공기가 덜 시원하듯이, 마음속에 품은 정일지라도 자유로워야 하니까요.
정은 내 것인 것 같지만 온전히 내 것만은 아닙니다.
분명 내 마음속에 있는 것임에도 물처럼 흐르고 흘러 다른 사람의 마음속 기쁨이나 슬픔이 되기도 합니다.
때로는 즐거움이 되고 또 때로는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커다란 짐이 되기도 합니다.
저는 마음속에 존재하는 그대로 주려하지만, 받는 사람의 감정에 따라 새로운 변화를 만들기도 합니다.
이처럼 정은 결코 싸워서 이길 수 없는 것이니까요.
정이란 길거리에 버려둔 채 버려 둔 지키지 않는 물건과 같습니다.
어느 누구든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기만 하면 주인이 될 수 있는 것 또한 정이란 걸 겁니다.
이처럼 정이란 내가 아닌 상대방을 생각하는 지극한 마음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에게 정을 쏟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원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마음이 쏠리게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게 정은 일방적인 듯 하지만 전염병처럼 옮겨가 서로 마음의 소통을 이루는 것입니다.
또한 정이란 어쩌면 우리가 매일 먹는 밥과 같지 않나 싶습니다.
물론 생쌀로 먹어도 먹을 수는 있겠지만, 밥은 뜸이 들어야 제 맛이 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단단한 껍질로 덮인 벼를 알곡으로 만들고, 쌀뜨물을 걸러내서 솥에 담아 열을 가하고 뜸을 들이는 과정을 통해 밥이 되어지는 것처럼,
정이란, 언어(말)의 맹목적인 의사전달이 아니라, 마음이 담긴 정성이 첨가되어 만들어지는 요리와도 같으니까요.
이처럼 정이란 정적(靜的)이기보다는 동적(動的)이기에 정이 많은 집안일수록 큰소리가 많이 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렇기 때문에 정을 흘러가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가까운 가족일수록 일방적이 아닌 쌍방적이어야 합니다.
어떤 면에 있어서는 가족간의 언쟁이나 토닥거림과 같은 큰소리가 나는 것 역시 정의 또 다른 표현방법인 것이죠.
물론 이성에 의해 걸러진 절제라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서로 정을 표현하는 것에 인색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깊은 정이라도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추고 드러내지 않으면 알지 못하니까 말입니다.
우리가 서로 정을 나누는 것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정이란 놈이 너무 한 곳에 편중되면 그건 집착이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집착은 결국 떳떳함을 사라지게 하고 자신의 욕망만을 강요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미 가진 것임에도 더 가지려고 하고, 가진 것을 베풀기 보다는 울타리 안만을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는 자가 어찌 행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정은 인간관계를 연결시켜주는 고리와 같습니다.
누구를 사랑하고 미워하고 또 그리워하거나 증오하는 것 역시 정이 만들어 낸 내 마음속 허구일 런지도 모릅니다.
때문에 감정을 앞세운 인간관계는 어쩌면 부적절할 런지도 모릅니다.
사랑과 같은 따뜻한 정을 앞세운 인간관계는 몰라도, 병적인 집착이나 미움을 앞세운 인간관계는 결국 좋지 못한 결과를 남기기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미움이란 감정은 사람을 작아지게 보이게 하고 사랑이란 감정은 사람을 더 크게 보이게 하니까 말입니다.
이처럼 정은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음식을 씹듯이 꼭꼭 씹어 삼켜봐야 진정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 나에게 지고지순한 정을 베풀고 있음에도, 그 정을 단지 잔소리나 관심을 얻으려는 행동으로 치부해서는 곤란합니다.
그러므로 누가 나에게 화를 내는 사람이 있으면, 한번쯤 그 사람이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나 싶습니다.
마음을 비워야 새로운 마음이 들어오듯이 정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고인 물이 썩기 쉽고, 가둬둔 공기가 덜 시원하듯이, 마음속에 품은 정일지라도 자유로워야 하니까요.